장소의 경험을 통해 기억을 디자인하다
- 관리자
우리의 일상을 바꾼 '사회문제해결디자인' - 인지건강 디자인
2017년, 우리나라는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서울시는 인구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노령화 지수가 지난 10년 사이 127.3%가량 급증하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노인인구에게 가장 흔하게 발병하는 질병은 치매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 나아가 사회에도 고통과 부담을 주는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신체, 정서, 사회적 자극. 세 가지의 적절한 균형이다. 이중 한 분야에서의 결핍이 심화되어 전체적인 균형이 깨질 때 어르신들의 인지건강에는 적신호가 켜진다. 가령 신체 건강에 큰 이상이 없어도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회적 자극이 결핍되면 위험해질 수 있다. 삼각형의 한 축이 무너질수록 전체 도형이 어그러지는 것과 같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낙상사고가 치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극의 불균형으로 인해 인지능력이 감퇴되면 치매 진행 속도 역시 빨라지게 된다.
서울시는 2014년부터 사회문제해결디자인 정책의 일환으로 인지건강 디자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어르신의 신체, 정서, 사회적 특성을 반영하는 디자인을 개발하여 고령화와 치매노인 급증에 따른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안전한 보행을 위한 안전 교차로, 인지 능력과 시인성 확보를 위한 기억 우편함, 신체 활동 향상을 위한 운동 공간 등을 만드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건강한 노후를 위한 Well-aging의 초석, 인지건강 디자인
인지건강 디자인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르신들의 신체, 정서, 사회적 자극을 통해 일상생활수행능력(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을 원활하게 유지해 노인요양시설의 등의 입소를 늦추는 것이다. 나아가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커뮤니티에서 잔존 능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AIC(Aging in Community) 환경도 함께 조성하고자 한다.
매년 아파트형, 주택형, 공원형 등 유형별로 어르신 생활환경 전반에 걸친 인지건강 디자인 솔루션이 적용되었다. 어르신들의 일상생활을 개선해 안전과 정서적 안정을 확보함으로써 치매를 늦추거나 예방하고자 했다. 실제로 2016년도에 아파트형 솔루션이 적용되었던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의 경우 인지건강 디자인을 적용한 지역 주민들의 인지장애, 안전사고는 각각 30.8%, 24.4%가량 감소했다. 외출 빈도 역시 하루 2회 이상으로 증가한 비율이 39.9%나 이르렀다.
최근에는 코로나 상황을 대비해 방역위생을 고려한 선제적 디자인을 이슈대응형태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사람의 행태와 정서를 깊이 이해하는 따뜻한 관찰의 시선에서 문제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일상 풍경을 바꾸고 몸과 마음, 그리고 관계의 건강까지도 지켜나가고자 시행된 인지건당 디자인 사업을 3가지 유형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Part 1. 아파트형: 영등포구 신길4동 기억키움 마을 만들기 (2016)
인지건강 디자인 시범 사업은 임대 아파트 단지인 영등포구 신길4동부터 시작됐다. 영등포구 내에 노인 및 치매고위험군 밀집 지역이었던 신길동은 보행로와 차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오가는 어르신들의 보행 안정성 문제가 있었다. 또한, 작고 높은 곳에 표시된 일반인 위주의 시각 정보로 상대적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어르신들이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소통의 장이 되는 안전하고 편안한 쉼터, 정서적인 도움을 주는 녹지공간이나 원예 공간, 일생 생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운동 공간 역시 부재했다. 어르신들의 자존감과 함께 인지능력을 유지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에 신길4동 임대 아파트 주변으로 7가지의 기억으로 인지건강을 키워주는 '기억키움 마을 만들기' 솔루션이 적용되었다. 어르신들의 안전한 보행로를 위해 조성된 '기억둘레길'은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220m의 산책로이다. 바닥에 초록색으로 보행길을 표시하고 턱이 있는 부분은 노란색으로 구분하였다. 어르신들이 걷다가 지치는 경우를 대비하여 100m 간격마다 1인용 벤치도 마련했다. 거주지로 진입하는 '기억키움 출입구'에는 별도의 네이밍과 사인 디자인을 적용하고, 둘레길 코스에는 어두워져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낮은 키의 볼라드 조명도 함께 설치하였다.
영등포 신길4동 기억키움 마을 만들기 (2016) : 기억둘레길 적용 전후 모습(위), 기억키움 출입구(아래)
이용률이 떨어지고 외부인이 출입이 잦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기존 주민 휴식장소는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기억쉼터'로, 방치되어 있던 배드민턴장은 운동을 위한 '기억마당'으로 탈바꿈했다. 기억쉼터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어르신들이 평소 즐겨 들으시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기억갤러리에서는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의 아이템들이 전시되기도 했다. 인지적 자극을 기반으로 소통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건물 구조상 3개로 나누어져 있는 주차장과 출입구에는 각각 해, 달,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 인지 거점을 만들었다. 안전 난간과 미끄럼 방지 바닥, 벤치나 조명을 설치하는 등 디테일한 요소까지 세심하게 기획한 곳이었다. 어르신들이 혼란 없이 집을 잘 찾아갈 수 있도록 모든 층 벽면에 눈에 잘 띄는 색으로 큼지막하게 층수와 호수, 방향을 안내하는 사인을 비치한 것은 기본이었다.
사전 신청을 받은 어르신 50가구에는 일러스트 작가와 함께 그린 '기억문패'가 설치되었다. 숫자로만 구분하느라 헷갈렸던 출입문에 어르신들만의 개성이 더해지며 인지력과 함께 자부심, 자존감도 함께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대한치매학회가 286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지 거점 확보나 혼란 감소 등에 대한 만족도가 최대 75.9%를 차지하는 실효를 보였다.
영등포 신길4동 기억키움 마을 만들기 (2016) : 층별 안내 사인, 기억문패, 기억갤러리
Part 2. 공원형: 금천구 시흥동 100세 정원 (2019)
서울시는 금천구 시흥동 청담사회복지관 외부에 '100세 정원'을 조성하며 보다 적극적인 인지건강 디자인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금천구 시흥동은 전체 인구 중 치매 고위험군 인구 비율이 13%에 달하는 지역이다. 저층 주거지 밀집 지역으로 주변에 공원과 같이 안전한 산책 장소가 부재했고, 보차분리조차 되지 않아 오토바이 사고 등이 두려운 어르신들의 외부 활동을 점차 꺼릴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일상 공간에 갇혀 섬과 같은 고립 생활을 이어가는 경향이 점차 짙어졌다.
2019년 오픈한 '100세 정원'은 국내에 치유 환경 개념을 도입한 첫 사례로 금천구 시흥동 청담종합사회복지관 외부공간을 활용하여 장소를 기획하였다. 100세까지 건강을 위하여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정원의 의미로 '100세 정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금천구 시흥동 100세 정원 (2019) : 봄, 여름, 가을, 겨울 24절기 순서에 따른 순환 동선
240m 길이의 산책로에는 24절기를 대표하는 꽃과 나무 100여 종을 심어 어르신들의 오감을 자극하고자 했다. 산책길 곳곳에는 5가지 종류의 맞춤형 운동기구와 허윤희 작가와 함께한 나뭇잎 일기 갤러리 등을 조성하여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자극을 유도했다. 240m의 산책로를 하루에 5바퀴(1.2km)만 돌아도 건강수명이 15분 증가한다는 정보와 함께 어르신들이 일상에서 매일매일 장소를 활용하시도록 독려하였다. 이러한 치유 환경에 대해 서울대 심리학과 최진영 교수는 "노화로 감각 기능이 떨어진 어르신들이 다중 감각을 통해 지적자극을 주고, 자연은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며, 동료들과의 만남을 통해 고독감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라며 궁극적으로 치매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천구 시흥동 100세 정원 (2019) : 오감자극 식재로 구성된 화단(위), 사회활동 유도 원예치료 교실(아래)
'100세 정원'은 오픈과 함께 실제로 정원을 이용하는 어르신을 대상으로 또 다른 어르신이 직접 진행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복지관에서 운영한 원예치료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정원은 분수 물소리나 새소리등의 청각적 자극을 비롯해 실제 먹을 수 있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등으로 미각을 활용하는 등, 입체적으로 계절을 인식하고 자연 콘텐츠들을 통해 오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 정원 곳곳에 설치된 신체 활동 기구들은 어르신들이 쉽게 따라 하실 수 있도록 난이도를 섬세하게 맞추었으며 균형 강화, 시력 증진, 바른 자세, 뇌 건강 향상 등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금천구 시흥동 '100세 정원' (2019) : 허윤희 작가와 함께한 나뭇잎 일기 갤러리, 이요안나 작가와 함께한 꽃보라 갤러리
Part 3. 이슈대응형: 비대면 면회공간 가족의 거실 (2021)
중증 치매 이상의 어르신들을 위한 인지건강 디자인 사업도 함께 진행 중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서 요양 시설에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이들은 생이별의 아픔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어르신들은 코로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족과 1년 넘게 만나지 못하면서 자식들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설사 대면 면회가 가능하더라도 마냥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유리나 비닐 벽이 그들의 사이를 가로 막았고 마이크 환경은 열악했다. 10분 남짓한 면회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졸지에 약 6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코로나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비대면 면회공간 가족의 거실 (2021) : 내외부 전경, 방역 글러브
비대면 면회 전용공간인 '가족의 거실'은 이러한 배경 속에 탄생했다. 서울시는 우리 집 거실 같은 편안한 공간을 조성해 가족 간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되돌려주고자 했다. 코로나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거실인 셈이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기존 면회실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손을 맞잡은 대화도 가능하다. 선별 진료소 검체 채취에 사용되는 방역 글러브를 설치한 덕분이다. 면회 공간은 유리창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고 청력이 약한 어르신들을 위한 고성능 음향 시스템도 조성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연결해 휴대폰의 사진과 영상을 함께 볼 수 있는 대형 화면도 설치되었다. 휠체어 및 이동형 침상을 활용하시는 어르신들도 편하게 면회가 가능하게끔 내부 설계에도 신경을 썼다. 시립동부 노인 요양센터에 시범 설치되었던 '가족의 거실'은 설치를 원하시는 시설에 한해 디자인 매뉴얼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요양시설 외에도 노인, 장애인 이용시설 등 대면 면회가 제한된 곳이라면 어디든지 활용 가능하다.
비대면 면회공간 가족의 거실 (2021) : 영상 통화 및 미러링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고령인구 비중이 20.3%에 이르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전 국민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인 셈이다. 기존의 도시, 주거 공간은 그런 측면에서 리디자인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초고령 사회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대비가 더욱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얘기다. 디자인은 말 그대로 문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최적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서울시는 인지건강 디자인과 관련해 가이드라인과 사례집을 통해 타 시도와 공공기관 등에 보급해 해당 사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글 | 디자인프레스 객원 에디터 오상희(designpress2016@naver.com)
진행·편집 | 디자인프레스 권예랑
사진 | 516스튜디오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 서울시 문화본부 디자인정책과